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캇 베이커(1970) (문단 편집)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1998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때 삼성은 투수진 보강을 위해 [[호세 파라]]에 이어 2라운드에서 베이커를 뽑았다. 당시 기준으로 화려한 메이저리그 경력을 가진 파라와 달리 베이커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에서 활동은 1995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중간계투로 1경기 등판한 게 전부인 무명선수였다. 또한 강속구를 갖고 있어 대어로 평가 받은 파라와 달리 베이커는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였다. 그래도 당시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은 낮은 편이라 메이저리그에 한번도 올라가지 못한 선수도 꽤 있는 마당에 1경기라도 메이저리그 등판 기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커리어였기에 [[이문한]] 스카우트가 강력 추천하면서 삼성은 베이커를 지명하게 되었고, 그가 선발의 한 자리를 맡아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베이커는 스프링 캠프 때 구속이 130km/h대를 근근히 유지하는 가운데 '음식이 안 맞는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등 핑계를 대면서 시종일관 불성실한 모습을 보였고 스프링 캠프 도중 가정사를 핑계로 귀국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구단에 밉보인 가운데 시범 경기 때도 부진했다. 그러면서 구단 내부에서는 베이커의 영입에 굉장히 실망했고, 베이커의 영입을 관철한 [[이문한]] 스카우트는 사직을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정규 시즌이 시작된 후 외국인 선수로서 첫 승을 기록하는 등, 눈부신 호투를 보였고 전반기에는 [[현대 유니콘스]]의 [[정민태]]와 다승왕 경쟁을 하며 10승을 올리며 전반기 다승 1위를 기록한다. 후반기에는 부상이 겹치면서 페이스가 주춤했지만 그래도 시즌 15승을 기록해 다승 3위에 올랐다. 삼성은 베이커와 재계약을 원했지만 베이커는 연봉으로 25만 달러를 요구했다. [[1998년]] 베이커의 연봉은 6만 달러라서 그 4배가 넘는 셈이었는데 당시 외국인 선수와 재계약할 경우 연봉 인상 상한선이 전년도의 10%라서 베이커의 요구는 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또한 딸까지 둔 유부남인데도 경기가 끝날 때마다 여자를 요구했고'''(...)[* 구단 치어리더와 하룻밤을 요구했다는 설까지 있다.] 평소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에 불만이 많아 한 번은 심판 판정에 불복해 심판에게 욕설을 하는 등[* 이 날 베이커가 심판판정에 대한 불만으로 거의 태업성 플레이를 하다 결국은 퇴장당했고, 이 덕분에 [[삼성 라이온즈|삼성]]은 라이벌 [[현대 유니콘스|현대]]에게 무려 '''6:19'''로 깨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흔히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을 대구아재들의 끝판왕으로 평가하지만, 이 경기도 그에 못지 않게 엄청난 난동이 벌어졌다. TV로 중계되긴 했지만 그닥 중요한 경기가 아니었던 탓에 묻히긴 했지만.], 성격적인 문제와 결정적으로 금액 차이로 인해 결국 어깨 부상을 빌미로 계약을 포기했다.[* 결정적으로 삼성은 당시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단 한번도 못했기 때문에 큰 경기에 강한 선수들을 원했고 약한 선수는 가차없이 버리던 시절이었는데, 베이커가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를 다 말아먹어 삼성이 정규시즌 2위로 플옵에 직행하고도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하지 못하게 된 1등공신으로 찍혔던 게 결정타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베이커는 멕시코 리그, 독립 리그 등에서 활동했고 [[2002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 외에도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폭행시비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당구장에 놀러 갔다가 한국인들과 시비가 붙었던 것. 그런데 당시에도 여자친구라는 한국인 여자를 두 명 끼고 있었다니 여자를 좀 많이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